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문단 편집) === 기병과 함선을 이용한 기동전 === 왜구들은 황산대첩에서 1,600여필의 말들이 노획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기병을 대규모로 동원했다. 심지어 기록상에서는 기병으로만 이루어진 왜구도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왜구는 함선을 통해 강을 거슬러 내륙을 휩쓸었다. 선박과 기병, 이 두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왜구는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게 되었다. 그외에 기마대가 있는 해적으로는 동여진이 있는데, 여진은 원래 기마 유목민족이니 크게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일본인은 농경민족이고 농경민족에게 기병은 비용이 상당하고 젊은 시절부터 훈련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은 순수한 해적 출신이라고 보기가 힘들어진다.[* 나라 시대인 8세기 전반에 기록된 히젠노쿠니후토기(肥前国風土記)에는 왜구의 주요 근거지중 하나인 고토렛토(규수 서부의 여러 섬들)에 포함된 지카시마의 주민들에 대해 "그 지역에는 말과 소가 많이 있고, 그 지역 사람들은 항상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일(騎射)을 좋아한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가마쿠라 시대의 마쓰라토 무사들의 소령 목록 중에는 말을 사육하는 마키(牧)가 포함되어 있었다. 출처: <황국사관과 고려 말 왜구>/ 이영 지음][* 아울러 왜구의 주요 근거지였던 일본 서부 대마도(쓰시마)의 말은 다이슈마(對州馬)라고 불리며 무사가 타는 말로서 중앙에 헌상되었다. 요컨대 일본 고유의 재래마의 일종이었다. 속일본기(続日本紀) 천평(天平) 11년(739년) 3월조에 대마도가 신사에 사용할 말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고, 관인(寬仁) 3년(1019년) 여진족 해적인 도이(刀伊)가 오다우라(小田浦)에 침입해서 소와 말을 약탈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 해적으로 유명한 오자카시마(小値駕島) 니시우라베(西浦部) 아오카타 촌(青方村)의 영주 아오카타(青方) 씨가 가마쿠라 말기에 소유하고 있던 영지 중에는 말을 방목하는 목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말을 바닷길을 이용해서 수송할 경우, 규슈에서 단번에 동중국해를 횡단해서 본토에 이르는 루트와 달리, 이키와 대마도를 거쳐 고려 연안을 섬에서 섬으로 옮겨 가며 건너는 단거리 루트를 이용한다면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니다. 또 500척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선단이라면 1600필의 말도 수송이 가능할 것이다. 여기에 남북조 내란이라는 특수 상황을 고려한다면, 일본 본토에서부터 대부대가 약탈을 목적으로 고려에 상륙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출처: 왜구와 고려 일본 관계사/ 이영 지음] 이때 침공해 온 [[왜구]]들의 정체가 실제로는 패망 직전에 몰린 일본 [[남조#s-1.4]] 조정의 군대가 아닐까하는 설도 이것을 근거로 제기되었다.[* 사실 원래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마 궁수들이었다. 그래서 가마쿠라 막부 시대부터 사무라이들이 갖춰야 할 [[무예]]를 가리켜 '궁마(활과 말)의 도'라고 불렀다.그리고 남북조 시대 일본 무사들은 말을 타고 칼과 창 같은 무기들을 쥐고서 적을 향해 돌격하는 마상타격전을 주특기로 지녔으니, 왜구 중에서 기병이 많다고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